1129일의 전쟁일지

1953년 2월 12일 (964일 째); 밴 플리트 彈藥量

김순욱 0 151 02.13 13:40

1953년 2월 12일 (964일 째); @from=papa3378&rcpt=papa3378%40daum.net&msgid=%3C20180210160515.HM.000000000001dHc%40papa3378.wwl2007.hanmail.net%3E

 

오늘의 전황(1953.2.12)

* UN군, 동부전선에서 소규모 攻擊.

* UN군 수색대, 문등리계곡 근방에서 공산군 1개소대와 40분 交戰.

* 기타 前線에서는 경미한 탐색전.

* UN 해군 함재기 편대, 元山항 폭격.(기타 지역, 惡天候에 의한 공군 활동 制限)

* 英 聯邦軍司令官, 韓國軍 1千名이 英國軍에 편입(編入)되었다고 言明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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남다른 결단력 보여준 ‘밴 플리트 彈藥量’
 밴 플리트가 6·25전쟁 당시 미군의 탄약량을 늘리기 위해 로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주고받은 서신도 있다.

당시 밴 플리트 장군은

 와해된 한국군을 미군과 함께 재편성하면서 미 육군 규정의 기준량을 5배 이상 초과하는 탄약 사용을 승인했다.

이후 미 제48포병대대의 경우 하루 동안 1만2000발의 화력을 퍼붓기도 했다.

비용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50억 원을 쓴 것이다.

 이러한 엄청난 물량 공세는 ‘밴 플리트의 탄약량’이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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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53년  '戰時 大韓民國의 敎育熱'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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매 순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 와중에도

 학교는 학생을 뽑아 교과서를 나눠주고 시험을 치르며 가르쳤다.

목숨이 위태롭고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했지만

 제도권 교육이 나름 제 기능을 했다는 얘기다.

여기엔 한국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이 한몫했다.

 

초등의무교육도 이때 마련됐다.

50년부터 6 개 년 계획을 세워 진행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늦어져 54년 시행됐다.

50년대 지출된 교육 재정을 보면 의무교육비에 지출된 예산이

전체 문화교육부(현 교육부) 예산 가운데 무려 60∼80%를 차지했다.

이승만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초등의무교육이 뿌리를 내린 셈이다.

부모의 열의와 정부의 노력이 더해져 50년대 말

초등학교 취학률은 거의 100%에 이르게 된다.

 

“어떻게 목숨을 다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배움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선배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.

특히 백낙준(1895∼1985) 문교부 장관의 공이 크다.

취임한 지 50여 일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백 장관은

‘아무리 비참한 전쟁 중이라도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’는 철학이 확고했다.

51년 2월 ‘전시하 교육특별조치요강’을 발표·시행해

제도권 교육이 단절되지 않게끔 민첩하게 대응했다.“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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